강희제가 나오는 드라마에서 신분이 낮다고 늘 무시당하던 양비입니다 보장경심에서는 양비가 제8황자의 앞길을 가로막는다고 약을 먹지 않고 사실상 자살한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후궁 견환전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섭란의가 입궁했을 때 연이 신자이고 노비 출신 양비보다 신분이 더 비열한 아이가 있겠느냐며 무시당했습니다.
적막공정의 춘욕만은 양비가 주인공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왜곡밖에 없어서(. ) 말할 수는 없습니다.
- 성: 각선씨 또는 위씨 – 민족: 만군기 정황기 포의→ 만군기 정람기 포의→ 만군기 정람기 포의- 출생: 강희 원년(1662년) – 사망: 강희 50년 11월 20일 – 품계: 양빈→ 양비- 아버지: 정오품
- -강희원년에태어나서강희제와는8살차이입니다.
강희 14년 정월에 14세의 나이로 입궁하였습니다.
강희 20년 2월 4일에 황8자 윤사를 낳아 신분이 낮아 아들을 키우지 못하자, 8자녀는 4자녀 중 하나인 혜비 납란씨가 키웠습니다.
강희 28년의 빈이 됐습니다- 강희 37년 3월 윤사가 다라패륵에 책봉되고 강희제가 아끼는 아들 중 한 명이자 가장 젊은 나이에 작위를 받았습니다.
강희 39년 12월 양빈에 봉해진 후 얼마 되지 않아 비로 승진했습니다.
청나라 초기 내관령 가문으로 빈이상의 지위를 얻은 후궁은 양비가 최초입니다.
강희 50년 11월 병을 앓아 같은 달 20일에 향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신자고노비의 진실
양비가 노비 출신이라는 얘기가 퍼진 건 당시 청나라의 특이한 제도였던 ‘포의’를 한자로 옮겼을 때 노비로 해석되면서 생긴 오해입니다.
많은 사람이 신자인 것을 진짜 천민급 노비로 여기거나 죄인으로 여기지만 아니에요. 청사 연구가 막 활발해진 시기에 생긴 오해입니다.
요즘은 학자들이 만주문자를 배우고 만주 관련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옹정의 황위찬탈설, 신자 죄인설 등 세상에 알려진 사실과 다른 것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두 집안이 내무성의 포의(布衣)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한미의 귀족이 되는 정도지요. 포의 출신은 황실에 속하며 아포 내의 관직인 내관령은 정오품 관직으로 황실의 업무를 돕습니다.
황실의 내관령은 상삼기포 출신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하오기 출신자는 왕부의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이렇게 양비의 신분은 결코 낮다고 할 수 없고, 실제 양비처럼 포의 출신 후궁들은 예전의 황제도 강희제도 꽤 있습니다.
<팔기주자씨기통보(八旗州氏族通進)>의 기록에 따르면 양비의 가족들은 청초기에 의존하기 시작하여 가족 중 일부만 신자고에 편입되었고, 이렇게 신자고에 들어가는 사람은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라 공적이 있으면 판매기 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포의출신자가관직을수임함에있어정4품이상으로는할수없는한계는없고대학사,도통,부도통,내관령등다양한방면으로진출하였습니다.
『청궁중의 궁녀중심계층(이긍궁녀관적여ā)』에 따르면 청나라 궁녀 선발규칙은 순치 8년으로 정해졌다고 합니다.
내무부, 만주상황, 양환, 정백기 상삼기좌령과 관령에 속하는 포의상여식은 반드시 수녀 선발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에 양비도 수녀 선발을 통해 궁녀에 입궁하였습니다.
강희제의 후궁들 중에는 양비처럼 궁녀 출신이 여럿 있는데 유독 양비만 강조되는 이유는 8황자 때문입니다.
8황자가 나오는 드라마에서 양비가 나올 리 없죠.
양비의 성은 무엇인가?
양비는 위씨로 잘 알려져 있는데 각선씨 출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먼저<청렬대비비고고>에양비위씨라고적혀있으며만주의정황기포출신으로내관령아포내의딸이라고적혀있습니다.
아포내가 죽고 나서는 타한이라는 사람이 관리를 이어 받았다고 합니다.
<씨족통첩>에서 각 씨를 보면 보주의 손자가 지붕에 나오고 증손자가 탑한에 나왔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들이 제 관령의 자리를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타 60과 탑 60과라는 만주어를 한자로 읽다가 생긴 오류로, 같은 인물입니다.
‘옹정조옹문주비절전역'(‘정조옹문주절전역)’ 62열에 ‘정황기의 도통, 마이살이 염왕의 외숙 등을 대기시켰다’는 내용이 있으며, 염왕의 외숙부가 알달헌으로 옹정 원년에 포좌령으로 대기하다 만주정황기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옹정제의 기록 중 다른 것을 보면, 옹정 4년 10월 16일 “정황기, 만주, 도통, 공은덕 등이 아기 외삼촌의 알달결혼 족인을 포의좌령으로 입으려 합니다.
이 말이 전해지자 옹정은 “원래 알달헌은 천의 좌령으로 미천한 노비 출신이며, 이것이 천의 좌령에서 빼내는 일을 관리하도록 내무성 관령으로 썼는데 이 은혜를 어찌 모르느냐”고 합니다.
이 상유를 보면 합달혼은 원래 포의 좌령 출신임을 알 수 있고, ‘흠정팔기씨족통첩’에서 각 선씨의 합달혼이 내무부 총관을 맡은 것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종합하면 양비의 아버지와 성과 기적, 이력은 팔주만주씨족통보 속의 각주씨와 일치합니다.
따라서 양비는 분명 만주인이며 성은 각선입니다.
어쩌다 위씨라고 불리게 됐는지는 좀 더 조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양비는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을까.
양비가 뒤늦게 비에 오르면서 보보경심 이미지 때문인지 총애를 못 받는다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적막공정의 춘욕만 방영될 때도 사람들이 양비는 총애받지 못했는데 주인공으로 하여금 강희제의 총애를 받게 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양비가 강희제에게 푸대접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강희제도 양비에게 어느 정도 정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양비는 승진해서 빈과 비까지 올랐지만, 강희조 전반기의 후비 중 생존해 비에 오른 사람은 단 다섯 명뿐입니다.
그중 양비가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양비에 오른 것은 강희 39년(1700년)으로, 이때 양비가 38세로 당시 혜비 납란, 영비 마가, 덕비 오아, 의비 곽락라뿐이었습니다”
보구경심에서는 양비가 죽은 후 강희제는 안에 들어가지 않고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 가마에서 약희는 무심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양비가 죽었을 때 강희제는 친히 제사에 참여했습니다.
원래 황태후나 황후가 죽은 후에는 황제가 반드시 참석하지만 황태후는 거의 참석하지 않습니다.
양비는 강희제로부터 직접 술을 받고 그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양비를 신고천한년이라고 한 것은 청성조실록과 옹정조가 편찬한 상유에 나오는 말이라 강희제가 친필로 어디에 쓴 것도 아니고, 거기에 대한 근거가 되는 문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과연 강희제가 직접 이 말을 했을지는 의문입니다.
강희제 때는 기록이 정말 부족한 것 같아요. 청나라의 기초가 세워질 무렵에 만주족이 한자를 배우기 시작했고 한족은 만주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입니다.
만주족만의 특수한 체계가 한족국가에는 없었기 때문에 한문 기록도 이상합니다.
미빈들에 대한 기록도 정말 허술하기 짝이 없군요. 양비를 찾아 헤매다가 위씨가 아니라 곽성씨라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 각선 씨라는 이야기가 보보 경심이 방송된 2011 년에 이미 있었습니다.
언제쯤 각선산이라고 주장이 됐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지금은 위씨라기보다 각선씨라는 게 중론이지요.